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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평 : 초조한 마음 (슈테판 츠파이크,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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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이라는 감정과 그로 인해 번민하는 인간의 심리를 제대로 묘사하는 작품. 제목 그대로 주인공의 초조한 마음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 뛰어나다. 간단하게 말해서, 주인공은 미성숙한 인격을 갖고 있다.  읽고 있노라면 이런 병신같은 놈이 있나 싶지만, 나 역시 미숙하던 시절에 이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다.  자신만의 기준이 없고 타인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는 연약한 심성 말이다.  그리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 비겁함. 자신의 언행이 어떤 무게를 갖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자는 위험인물이다. 이런 미성숙함으로 인해 큰 비극이 일어나는 일은 흔하지 않지만, 분명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것이고, 그러한 가능성을 극단까지 가져가보는 것은 문학작품만이 할 수 있다. 주인공은 작품 내내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한다.  연민으로 접근한 상대에게서 구애를 받자, 거절했다가 다시 연민 때문에 흐지부지 다가가고 거절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읽는 사람도 주인공과 같이 롤러코스터를 타게 된다. 주인공의 공포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관계에 구속되는 것이다.  케케스팔바 가족을 동정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가족이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케케스팔바 가족은 동유럽에서 백안시되는 유대인인데, 동료 집단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두려움을 느낀다. 이러한 주인공의 공포를 극명하게 이미지화 한 것이 아라비안 나이트의 노인 악마이다. 힘없는 노인의 모습을 하고서 동정을 구하는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 업어주면 절대로 떨어지지 않고 피해자를 통제하는 악마.  어느 늦은 밤 자신의 방으로 찾아와 딸의 사랑을 받아주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제안하는 케케스팔바 노인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마음에 그 악마가 겹쳐보인다.  그리하여 결연하게 노인을 거절하고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지만,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쓸쓸하게 돌아가는 노인을 보고는 그만 자신의 말을 번복하고 그녀의 사랑...

독서평 : 도서실에 있어요 (아오야마 미치코, 달로와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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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분의 추천으로 읽기 시작한 소설인데, 처음에는 어쩐지 조금 시시하게 느껴졌습니다. 무기력한 주인공이 우연히 구립 커뮤니티 센터의 도서실에 들렀다가, 힐링받고 새로운 힘을 얻어 의욕적으로 살아간다는, 조금 뻔한 이야기일 것 같아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다 읽게 만든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무너졌던 삶을 일으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직접 읽어보지 않으면 이 책이 주는 감동을 느끼지 못할 것 같아요. 삶을 반전시키는 계기를 주는 것은 바로 도서실을 방문하는 이벤트입니다.  사서는 무심하게 방문자의 목적을 묻고, 그의 상황을 몇 마디만 듣고는 척척 책을 추천해줍니다.  그 추천 목록을 받아본 방문자는 어리둥절해지고 맙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그 책을 대출하고 읽어봅니다. 왜냐하면, 달리 별다른 수도 없기 때문 입니다.  <타력>이라는 책 에서 이런 기분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간절하게 바라는 목적에 대해 말하는 책이 아닌, 전혀 엉뚱한 책이야말로 내 삶에 해답을 가져다주는 일이 일어납니다.  물론 그 책에서 답이 나온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책을 손에 들고, 펼쳤을 때 어떤 일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니, 부담없이 한 번 읽어보세요. 도서관에 한 번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독서평 :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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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리문학이라는 장르. 모든 챕터가 요리 레시피로 시작한다. 요리 재료를 나열한 페이지가 나오고, 본문에서는 요리를 시작하는 장면으로 챕터를 연다. 양파를 다지고, 고기를 볶고, 향긋한 냄새가 주방에 퍼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멕시코 요리에 대해 자세히 몰라서 조금 아쉬웠다. 만약 멕시코 요리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요리를 하는 장면에서 챕터를 규정하는 느낌을 강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약간 판타지 성향이 다분한 소설이기도 하다. 묘사에 과장이 심한데,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티타의 눈물이 강같이 흘러 계단으로 쏟아져 내려가면서 콸콸 쏟아진다던가. 집안의 독재자 엄마 때문에 결혼도 못하는 일이 있다고? 심지어 청혼하러 온 남자에게 다른 자매랑 결혼하라고 부추긴다고? 그리고 그 남자는 그걸 받아들인다고?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설정이지만, 그래야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으니까. 마더 엘레나는 어쩌면 그렇게 냉혈인간인지. 나중에 그녀의 인간적 약점도 드러나지만, 자신의 친딸에게 해도 해도 너무한다. 주인공 티타는 실연의 상처로 점차 무너져가지만 그녀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주방 생활과 맛있는 음식들이다. 이 책의 주제는 에로틱한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여성 작가가 여성의 입장에서 풀어내는 에로티시즘이 인상적이다.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눌 때도 무협지처럼 과장된 묘사가 나오는 것이 웃기다.

독서평: 할렘 셔플 (콜슨 화이트헤드,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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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렘에서 작은 가구매장을 운영하는 레이 카니는 험한 동네에서 험하게 자라났지만 정직하게 살아가려 합니다. 그런데 어쩐지 주변의 범죄자들과 자꾸 엮이게 되면서 그도 조금씩 말려들게 되는데… 레이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흑인 중에서도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났고, 그 때문에 장인과 장모는 레이를 은근히, 대놓고 무시합니다. 레이는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은 물론이고, 복수도 하게 되는데… 재미있냐고요?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에 따라 다릅니다. 이 작품은 줄거리가 재밌다기보다는 분위기를 즐기는 작품입니다. 당신은 작가의 안내를 따라 뉴욕 할렘의 어두운 골목을 누비고, 주인공이 느끼는 긴장을 같이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는 빛과 어둠의 영역 양쪽에 모두 발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죠. 이 긴장감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캐릭터 쇼이기도 합니다. 각 캐릭터의 개성과 매력이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힘입니다. 사고뭉치이고 주인공을 범죄의 세계로 말려들게 만드는 사촌 프레디. 레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지만 속을 알 수 없는 깡패 페퍼. 레이에게 돈을 뜯으러 찾아오는 부패 경찰. 레이에게 보호세를 받아가는 폭력조직. 레이에게 보석 보는 법을 가르쳐주는 노련한 장물아비. 레이의 이중 생활을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직원들. 가난한 흑인을 경멸하는 부유층 흑인들. (레이의 장인 장모도 포함)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플롯이 치밀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레이가 과연 살아남을수 있을지 걱정하며 읽었습니다. 종장에는 드디어 레이에게 파국이 찾아오는가 싶어지는데... 당신이 결말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해집니다.

독서평 : 해 질 무렵 안개정원 (탄 트완 엥, 자음과모음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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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면 여운이 있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이 딱 그런 책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한마디로 말하기엔 부족한 느낌입니다.  소설의 무대인 말레이시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배경이 다양한 것이 인상적이다. 말레이시아에서의 삶이란, 어떤 것일지 조금이나마 경험한 느낌이다. 주인공 윤 링과 그녀의 가족들은 중국계이지만 중국어를 할 줄 모르고 말레이 반도에서 굳게 자리잡은 해협중국인들이다.  본토 중국인들과 서로 감정이 좋지 않다. 말레이 원주민들과도 계급차이를 느낀다. 윤 링 가족과 긴밀한 마주바 차 농장의 주인은 네덜란드계 남아공인. 그들은 푸른 눈의 백인이지만 말레이 반도를 지배하는 영국인들과 감정이 좋지 않다. 보어 전쟁에서의 기억 때문이다. 여기에 말레이 반도를 침략한 일본군이 있다. 일본군은 강제 노동 수용소를 만들고 여성들을 위안부로 만드는 만행을 저지르는데... 일본이 패퇴하고도 여기에 남아있는 조경사 아리토모는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전쟁은 그들을 망쳐놓았고, 그 잔해 속에서 삶을 이어나가지만 상처는 아물 줄을 모른다. 그 때 언니의 유언에 따라 일본식 정원을 만들고자 하는 윤 링이 아리토모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함께 정원을 가꿔나가게 된다. 정원에 대한 일본의 철학을 조금씩 배워나가는 주인공. 정원을 가꿔나가는 노동과 변화해가는 계절들이 독자의 심상에서 정원을 만들어간다. 윤 링과 아리토모의 사랑이 아름답다.  서로 외모에 반해서도 아니고 같이 있는 시간이 즐거워서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것들을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 다시 기억하기조차 싫은 고통의 시간들을 담담하게 말하게 해주는 사람. 보통이라면 무례하게 느낄수 있는 질문들을 해오는 사람. 이런 에피소드가 하나씩 쌓여나가면서 사랑에 빠지는 모습이 아름답다. 사랑의 완성은 아리토모가 윤 링의 몸에 문신을 새겨주면서... 아리토모는 어느 날 실종되어 버리고, 윤 링은 정원을 떠나 노인이 되어서야 돌아온다. 그리고 그들...

독서평 : 어메이징 브루클린 (제임스 맥브라이드, 미래지향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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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하나는 확실하다.  전체 플롯을 숨겨두고 조금씩 드러내는 솜씨가 좋다. 읽는 내내 다음이 궁금해지게 만드는 솜씨. 해피엔딩이라는 점도 무척 마음에 든다. 범죄와 악이 판치는 빈민 주택에서 따뜻한 마음과 정의는 살아서 움직인다.  아니,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정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힘이었음을 이 이야기는 말하고 있다. 악인들의 좌충우돌은 그냥 소음에 불과했다. 캐릭터는 정말 확실하다. 소설의 재미는 캐릭터에서 온다. 다채로운 캐릭터가 스토리를 풍성하게 만든다. 교회 집사이자 주인공인 스포츠코트. 그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알콜중독자이다. 어느 날 동네에서 마약을 팔고 있는 옛 제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총을 쏴버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동네 마피아인 엘레판테. 아버지 때부터 경영해온 밀수업을 묵묵히 수행하며 살아가는데, 40세 노총각으로서 외로움을 절절하게 통감한다.  노총각 생활이 길었던 나도 그저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 커즈하우스 사람들과 다른 범죄자들도 개성있는 인물들이라 심심할 틈이 없다.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스포츠코트와 딤즈의 마지막 담판 장면이다. 저자의 빌드업이 빛을 발한다. 그 장면에서는 그저 숨을 죽인 채 읽을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을 느꼈던 대목은, 경찰인 포츠와 지 자매가 서로 끌리는 순간을 묘사하는 장면들이다.  2,3회에 걸쳐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뤄지는데, 수사 중인 경찰과 증인의 입장으로 만나지만, 설레임은 감출 수가 없다. 읽는 사람이 가슴이 뛰게 만들 정도의 묘사가 좋다. 그 둘이 어떻게 될지가 궁금해지는 장면이었다. 이 책의 제목이 유감스럽다. 원제는 디콘 킹콩(Deacon King Kong)으로. 킹콩 집사라는 뜻이다. 주인공을 의미하는 것. 그런데 번역 제목인 어메이징 브루클린은 다 읽고 나니 조금 생뚱맞게 느껴진다. 소설의 무대인 커즈하우스가 브루클린에 있다는 정도인데..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킹콩 집사라고 하자...

독서평: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엘리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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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의 단편은 재미있을 뿐 아니라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 괜히 명성이 자자한 것이 아니다. 그는 과학적인 지식도 깊고, 인류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고 있다. 테드 창의 안내를 따라 그가 창조해낸 세계 속을 여행해보는 것은 분명히 가치있을 것이다. 바빌론의 탑 바벨탑 모티브의 이야기.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 탑. 여기에 원통 모양의 세계라는 설정을 접목. 기발하다. 이해 어떤 가상의 호르몬 치료제를 맞은 주인공은 갑자기 지능이 엄청나게 향상되어 신이 나는데… 정부가 자신을 구속하려는 낌새를 친 주인공은 모든 포위망을 뚫고 도망을 치는데… 마치 영화같다. 그의 지능향상이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장면이 무척 재미있다. 완전무결한 상태에 도달하나 싶었는데… 주인공과 대등한 초능력을 가진 누군가가 접근해오고? 영으로 나누면 조금 난해한 이야기. 우리가 지금까지 구축해온 수학의 체계가 다 의미를 잃어버린다면? 실존적 위기에 처한 주인공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데... 수학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좀 읽기 어려울 것 같다. 네 인생의 이야기 영화<컨택트>로 만들어진 바로 그 이야기 .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물리학을 깊이 배워본 적 없는 사람들에겐 그냥 이상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물리학에서 "목적론"적인 사고방식이 무슨 의미인가? 말하자면 빛은 매질이 달라질 때 굴절하는 데 최소의 시간이 걸리는 경로를 찾았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왜 빛은 이런 저런 경로를 시험해 보지 않는가? 여기에서 목적론적인 사고가 등장한다. 외계인은 결과를 이미 알고 있고, 정해진 경로에서 최선의 경로도 이미 알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액션을 취할 뿐이다. 인생을 고찰하는 아주 귀한 관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흔두 글자 좀 난해하다. 호문쿨루스가 마치 실재하는 일이었던 것처럼 등장하고.. 일종의 마법세계를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이 고도로 발전한 과학과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주인공은 자신의 재능에 이끌려 연구에 매진하지만, 알고보...

독서평 :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북다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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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재미없었던 적은 없었다. 최소한 읽는 동안에는 말이다. 믿고 읽는 작가 중의 한명이다.  살인사건을 겪은 유족들이 모여서 사건을 재검증한다? 그것도 강제성 없이 자발적으로? 다분히 일본스러운 설정이고 부자연스럽다. 그래도 소설이니까 용서해주고 넘어간다. 가가 교이치로 형사는 매력적이다. 냉정하고 논리적이면서도, 따뜻한 배려심이 있다.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용의자를 차근차근 밝혀나간다. 읽을 때는 몰랐지만 다 읽고나서 생각해보면 조금 웃기는 점이 있다.  용의자는 태연하고 침착하게 사람들 속에서 가가 형사의 추리를 구경한다. 하나씩 진실이 드러날 때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그러다가 가가 형사가 당신이 범인이라고 지목하는 순간, 또 태연하게 인정하고 차분하게 범행을 자백한다. 솔직하게 좀 납득하기 어려운 캐릭터들이다. 읽는 사람을 두번 놀라게 하는데… 특히 무고하고 순진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사람이 요주의 인물이다. 그건 실망스러운 점이기도 하다. 추리소설을 하도 많이 쓰다보니 이제 독자를 놀래키기 위한 방법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10년 하가시노 작품 중 틀림없는 최고 걸작이라는 홍보 문구에 동의 못하겠다. 재미있는 건 틀림없지만 평이하다.

독서평 : 광인 (이혁진,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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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전작 <사랑의 이해>는 읽지 않았지만 드라마를 아주 좋게 봤었다. 주인공 해원은 40대 초반의 싱글 남성. 그가 주식투자, 대출없는 아파트, 채굴같은 단어를 말하는 것이 내 또래라는 인식을 주어서 친근했고 금방 몰입할 수 있었다.  결혼 못한 스트레스로 엄마와 연락을 안한다는 설정. 이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지. 작가님 또한 딱 이 또래의 사람이었다. 위스키를 잘 모르지만 작중에 묘사되는 위스키의 맛에 대한 표현이 정말 좋다. 나도 위스키를 마셔보고 싶을 정도였다.  <경고> 스포일러 주의. 책을 읽고 난 후에 읽는 것을 권장함. 이 책에서 주인공 2인, 준연과 하진이 철학 이야기를 많이 해서 읽기가 조금 괴로웠다.  면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는가?  십중팔구는 없을 것이고, 그런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그와의 대화를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1인칭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는 정말로 면전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 기분을 느낀다.  아마도 작가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평소 생각한 것을 말하고 있나 싶었다. 준연과 하진이 이런 철학을 깊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인물 설정이기도 했다. 그들의 실제 삶도 그런 모습이기에 망정이지, 그냥 듣기에는 개똥철학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내용들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나, 해원이 서서히 미쳐가는 과정을 실감나게 풀어놨기 때문에, 중간에는 조금 읽기가 버거웠다.  특히 불을 지르기 직전에는 개새끼라는 둥 원색적인 욕설을 동원하여 증오심을 표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결국 준연과 하진을 두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혼자만의 망상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급격히 반전하는 심정을 묘사하는 것도 인상깊었다. 해원의 그릇이 크지는 않지만, 해원을 미쳐가게 만든 준연과 하진 두 남녀도 잘못했다는 생각이다.  그들의 도덕적 기준이 너무 높다. 두 남녀가 외딴 산속에서 몇날며칠을 밤낮으로 일하는 데 ...

독서평: 플로베르의 앵무새 (줄리언 반스,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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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나? 왜 이 작품이 소설로 분류되는지 잘 모르겠다. 화자는 플로베르라는 작가를 추앙하면서 그의 흔적을 쫓고, 독자는 그의 여정을 함께하는데 대부분 화자가 주절주절 떠드는 내용을 듣는 입장이 된다. 그 내용이 재미가 없다는 건 아니다. 다만 어떤 주요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작가가 플로베르의 연대기를 3번에 걸쳐 다르게 보여준 것은 무척 흥미로웠다. 인간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걸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나? 한 챕터에서는 플로베르의 연인이었던 여인의 변론을 소개한다. 그 부분도 무척 재미있었다.  또 다른 챕터에서는 플로베르에 대한 시험문제를 출제했다. 한국인이라면 익숙할 것 같은 형식이다. 나도 모르게 시험문제를 풀어보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게 되면서, 작가가 의도한 생각의 틀로 들어가는 경험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읽는 내내 당혹스러움을 느끼면서도 그만두지는 못했다. 생각해볼만한 고민들과 흥미로운 이야기들에 사로잡혀 끝까지 읽어내고 말았다.  다 읽고 작품해설을 보니, 이 작품은 “전기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작품이라고 한다. 사실 플로베르라는 인물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지만, 다양한 각도로 어떤 인물에 대해 접근해가는 방식은 분명 비교대상이 없는 독특한 경험이다. 화자의 말 중에서 가장 뜨끔했던 대목을 소개하고 싶다.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더더욱 준엄한 비판이다. 책은 일어난 일을 설명해 주는 곳이고, 삶은 설명이 없는 곳이다. 삶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는다. 책은 삶을 의미 있게 한다. 유일한 문제는 책이 의미를 부여하는 삶은 당신 자신의 삶 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 이라는 점이다. (209)

독서평: 수상한 중고상점 (미치오 슈스케, 놀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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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믹한, 유쾌한 추리소설입니다. 힐링 소설이라는 홍보 문구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읽으면서 마음이 어두워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주인공은 가사사기라는 엉뚱한 친구와 중고상점을 운영 중인데, 어쩐 일인지 그들 주변에서는 자꾸 사건이 발생합니다. 가사사기라는 친구는 탐정을 자처합니다. 그는 엉뚱한 추리를 연발하면서 실소를 자아냅니다. 가사사기의 개그 추리를 다 받아주면서, 진짜 추리는 주인공이 합니다.  사건을 해결하고도, 친구가 해결한 것처럼 만들어주는 따뜻한 배려심의 주인공.  해결 과정에서 여자의 부끄러운 개인사가 드러나지 않도록 보호하는 모습은 정말 멋집니다. 주인공이 친구를 감싸는 이유는 마음이 따뜻해서이기도 하지만, 친구와 사랑하는 사이인 나미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가사사기의 추리에 감탄을 연발하면서 그를 오매불망 사랑하는 귀여운 소녀입니다. 그녀의 진심이 궁금하시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면 됩니다.

독서평 : 야코프의 천 번의 가을 (데이비드 미첼,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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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습니다. 와, 정말 너무 재밌어요. 읽으면서 계속 감탄하면서 재밌다고 느끼는 중입니다. 이 책을 펼치면 당신은 그 세계로 빨려들어갑니다. 당신은 에도 막부시대 말기, 나가사키에서 유일하게 외국인 접촉이 허락된 데지마 섬에서 무역상인으로 일하는 "야코프 더주트"라는 네덜란드 사람이 됩니다. 1인칭 시점은 아니지만, 주로 야코프의 시점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들로만 서술을 제한하기에 이런 몰입감이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그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좋아합니다. 그런 소설은 흔하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제가 일본인들보다 야코프에게 더 동질감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야코프의 사고방식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제가 서구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주인공을 둘러싼 사건들은 미스테리 분위기를 물씬 풍기면서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일본 측 사람들은 의뭉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렇다고 네덜란드 사람들이 모두 친구이냐? 그것도 알 수 없죠. 누가 친구고 누가 적인지를 모르는 애매함이 긴장을 최고조로 높여줍니다. 주인공은 정직하고 선한 사람입니다. 직장인으로서의 조직에 대한 양심을 지키며 정도를 실천하려고 합니다.  부정부패를 일삼는 동료 직원들과 일본 측 통역관들은 주인공을 싫어하기도 하고 협박도 합니다. 이로 인해 느껴지는 긴장감이 재미를 더해줍니다. 그러나 작가가 설계한 음모는 너무 음침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갑자기 작품이 무협지 수준으로 떨어진 느낌입니다.  그러나 긴장감과 호기심은 오히려 커집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전개속도가 빠르고, 작가가 벌려놓은 문제들은 급하게 해결되는데 약간 당황스럽지만 또 나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런 해결이 최선일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야코프와 여주인공의 마지막 대화는 모든 것을 매듭짓는 장면입니다. 좋은 마무리입니다.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 역사를 좋아하신다면 더더욱 재미있을 것입니다....

독서평 : 퍼스트 레이디 (커티스 시튼펠트,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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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통속적인 면이 있는 책이어서, 이 책이 재밌었다는 사실이 약간 분하다. 그러나 재미있다. 이 작품은 성장소설이다. 주인공이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하는 재미가 있다. 주인공의 심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점이 특징이다. 갈팡질팡하고, 자신을 의심하고, 남편을 혐오하다가도 사랑하는 그 마음들.  남자로서 여자의 내면을 읽는 것은 무척 흥미로웠다. 성장과정의 실수와 방황들이 가감없이 묘사되는 것이 좋았다. 성적인 묘사도 아주 자세하게 나오는데 그것들이 야하게 느껴진다면, 읽는 사람 자신의 문제이다. 표지의 저 대사가 폐부를 찌른다. 주인공의 할머니가 조언해준 말이다. "잊지마, 남자들은 아주 불안정한 존재라는 걸." 남자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저 대사의 맥락을 좀 더 설명하자면, 방황하는 남편을 붙잡아주는 역할을 아내가 해야 한다는 것을 할머니가 조언해주는 것이다.  남편은 네가 그를 붙잡아주기를 바라고 있단다. 나는 이 작품에서 할머니가 가장 좋았다. 그녀의 지혜와 통찰력에 감탄한다. 명대사도 많은데, 그 중 한 장면을 꼽아보고 싶다.  "내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다른 사람의 생각 따위는 내 삶에서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 순간 나는 할머니가 미웠다. ... 나는 돌아서서 할머니를 쏘아보았다. "사람들은 원래가 복잡한 거란다. 복잡하지 않은 사람들은 따분한 사람들뿐이야." "그럼 저도 따분하겠네요."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주인공이 퍼스트 레이디라는 점은 사실 작품의 핵심은 아니다. 실제 영부인 생활은 후반부에 아주 조금만 나오니까. 하지만, 출판사에서는 셀링 포인트로 잡은 것 같다. 원제는 "American Wife"이다. 실존 인물이 모델인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재벌집...

독서평: 돈 (에밀 졸라,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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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자본주의, 특히 유가증권시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해 실감난다. 에밀 졸라가 주식에 대해 가진 시각이 뚜렷이 드러난다. 소설의 무대는 좀 더 후대의 일이지만, 존 로가 프랑스 미시시피 회사로 시장을 풍미하던 시절, 광기의 시절은 어떤 모습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주인공 사카르는 애초에 건전한 사업가가 아니다. 한탕 크게 해서 떼돈을 벌겠다는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다.  만국은행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끌어들여 실체도 없는 사업을 벌이겠다는 계획은 헛웃음이 날 정도로 공허하다. 그런데 이런게 또 실현되는 것이 이 세상이다.  오늘날에도 스타트업이니, VC니 해서 같은 동력으로 움직이는 인간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주식이 영원히 상승하면서 벼락부자가 되는 것을 꿈꾸는 인간의 모습은 어딘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사카르 혼자만이 아니다. 주변 인물들도 설마 설마 하다가 제발로 광기에 뛰어든다. 주식이 상승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떤 우화를 보는 듯하다. 결말은 정해진 수순이다. 본질과 무관하게 상승한 주식을 기다리는 것은 파멸적 하락이다. 위태위태하던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진다.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만연체의 문장이 읽는 것을 어렵게 한다. 등장인물이 많고 그들에 대한 묘사 또한 만연체로 진행되므로, 작품을 읽으면서 등장인물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면 다소 지루할 수도 있다.

독서평: 니클의 소년들 (콜슨 화이트헤드,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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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가슴이 많이 아팠다. 주인공 엘우드의 사연이 너무 기구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 전개되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 저자가 펼쳐보이는 스토리를 따라간다. 인권유린이란 것을 말로만 듣고 관념적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이 책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례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어서, 더더욱 남의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개인의 삶에 가해지는 폭력은 너무 큰 불행이다. 재발을 막는다고는 쳐도, 이미 일어난 고통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반전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면 작품을 읽고 느끼는 일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말하지 않는다. 저자는 소설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독자를 속였고, 그 진실은 어떤 대체현실을 생각하게 만들면서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 땅에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이 책을 많이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인권에 대한 어떤 담론보다, 이 이야기 하나가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독서평: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치누아 아체베,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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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삶이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농사를 짓고, 결혼하고, 싸우고 사랑하는 이야기들이 낯설지 않습니다. 물론 문화적 특이점은 있지만, 인간 본연의 모습은 모두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주인공 오콩코는 자수성가하여 부를 축적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삶이 녹록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저런 사건사고들의 그의 삶을 괴롭히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목처럼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일은 언제 일어날까? 궁금해하면서 읽었는데 과연 후반부에 그 일이 일어나고 서구권 출신이 아닌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등장하는 아프리카 부족의 풍습이라던가, 할머니가 들려주는 전래동화와 같은 문화적 특색이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그들의 토속 신앙은 처음 보는 것이지만, 어딘지 낯설지 않은 느낌을 주는 것은 왜일까요.

독서평: 이름 뒤에 숨은 사랑 (줌파 라히리,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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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특이한 주인공 고골리. 고골리는 러시아 작가의 이름이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작가이지만, 그에게는 그냥 이상한 이름일 뿐이다. 그는 이름때문에 청소년기를 힘들게 보낸다. 그러나 그 이름에는 아버지의 큰 사랑이 담겨있음을 그는 뒤늦게 깨닫는다.  이름은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까? 자신의 이름을 싫어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고골리는 벼르고 벼르다가 개명을 하지만, 막상 새로운 이름이 낯설고 어색하다. 그토록 싫던 이름은 어느새 내 존재의 일부가 되어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내 이름이 진짜 내 이름이다. 캘커타 출신의 이민자가 미국에서 삶을 꾸려가는 모습이 흥미롭다. 완전히 다른 환경 속에서 전통적 생활양식을 지켜나가지만, 자녀들은 미국인으로 자라난다. 이건 한국 교포들에게도 비슷할 것 같다. 고골리는 한동안 부유한 미국인 가족들과 동거하면서, 가족을 떠난 자유를 만끽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은 그를 다시 가족 곁으로 불러들인다. 이 모든 과정에서 고골리가 느끼는 감정들은, 나도 한때 느껴본 것들이다. 고골리의 결혼이 실패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그의 아내는 영혼 어딘가에 구멍이 나 있다. 외도를 저지르는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멈출수가 없다.  고골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성인이 된 후 까지 가족의 삶을 조명하는 방식이 좋다. 우리의 삶은 자꾸만 앞으로 나아간다.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아이들이 태어난다. 고골리가 아버지가 남기고 간 러시아 작가 고골리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이 좋다. 결국 이 작품의 주제는 사랑이다.

독서평: 침묵은 여자가 되나니 (팻 바커, 비에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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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이 없는 트로이 전쟁. 우리는 이 전쟁이 어떤 이유로 발생했고 어떻게 끝났는지를 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전쟁을 모른다. 이 책을 펼치면 당신은 그 시간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고대 전쟁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실감나는 전쟁과 인물 묘사 신화의 한 장면으로만 알고 있던 트로이 전쟁 속으로 들어와 있는 느낌이 가장 인상적이다. 전쟁터의 피냄새, 매캐한 연기, 죽어가는 부상병들과 구역질나는 냄새들.  외롭고 거칠고 모순에 빠져있는 우리의 영웅 아킬레우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영웅이지만, 그의 내면은 한없이 빈궁하고 유아적이다. 전쟁에서 이탈했다가 복귀하는 찌질함. 누구보다 사랑했던 친우를 잃고서 그는 내면에서부터 무너지고. 아가멤논과의 기싸움도 실감나게 묘사된다.  여성의 관점으로 본 전쟁 주인공은 전쟁 포로로 잡혀온 왕족의 여성 브리세이스이다. 그녀는 전쟁의 포상으로서 그리스의 용장 아킬레우스에게 "배분"된다. 여성을 물건 취급하는 고대의 사회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그녀는 아킬레우스를 포함한 모든 인물들과 전쟁터 전체를 관찰하고 마치 현대적인 여성처럼 분개한다. 그녀는 저자의 페르소나이다. 여성 인권이란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던 고대 신화속에서 분개하는 브리세이스를 보는 독자는 현재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현대의 여성들은 브리세이스의 분노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포로로 잡혀온 전쟁터의 여자들의 모습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가족을 잃고 전쟁터의 상품이 되어버린 아픔을 공유하는 그녀들. 그들은 서로를 돌보고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면서 상처를 견뎌 나간다. 남편과 자식을 살해당한 후 어느 장군에게 "배분"된 부인이 어느새 새 남편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하는 브리세이스.  그러나 그녀도 아킬레우스를 생각하는 마음은 복잡하다.  어머니의 사랑을 못받아 비뚤어진 아킬레우스를 측은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생의 친우를 잃고 난 아킬레우스는 망가지기 시작하고, 브리세이스에게 부...

독서평: 도어 (서보 머그더, 프시케의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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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작가의 소설. 헝가리 사람들이 헝가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겪지만, 낯설고 이국적인 무대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현대 사회 어디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진다. 이 작품의 원동력은 압도적인 캐릭터이다. 화자의 삶 속에 들어와 끊임없이 긴장을 일으키는 “에메렌츠” 여사는 고집불통이고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인물의 강렬한 언행들로 인해 읽는 동안 충격을 받기도 하고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작품의 주제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른 어떤 작품에서 이런 사랑을 다룬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화자와 여사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지만, 단 한번도 살갑게 애정을 표현하는 장면이 없다. 화자는 여사의 모욕적인 언행에 충격을 받기도 하고, 그 자신도 여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 모든 좌충우돌을 걷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사랑의 마음이다. 어느새 읽고 있는 독자도 화자와 같이 여사를 사랑하는 마음이 되어버린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하는 전개도 훌륭하고, 모든 것이 마무리된 후의 여운도 상당하다. 

독서평: 일몰의 저편 (기리노 나쓰오, 북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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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계속 놀라기만 한 작품이다. 이제는 해결이 되겠지, 이제는 주인공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겠지, 하는 예상을 무참히 깨버리는 전개이다. 그래서 더더욱, 종장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고 끝까지 거의 논스톱으로 읽어버렸다. 주인공 마쓰는 소설가인데, 성애 장면이 많이 포함되는 B급 작품을 주로 쓰는 작가이다. 어느날 소환장을 받고 끌려간 곳에서는, 주인공의 소설 내용을 문제삼으면서 교화를 시키겠다는 둥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여기서부터 약간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상황이 시작되는데... 수용소의 생활에서 주인공은 점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강렬하게 저항한다. 수용소의 부조리함을 따지고 드는 주인공의 발언은 자유주의 세계관의 정석에 가깝다.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내용들이고 짐짓 통쾌하기까지 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소설 속 수용소 운영자들은 코웃음을 치며 주인공을 압박해나간다.  이 소설이 독특한 점은, 고문과 감금 등의 극단적인 상황을 주인공이 겪는 과정을 1인칭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전쟁 중이나 인종청소가 횡행하던 시절이 이랬을까 싶을 정도이다. 점입가경으로 고난을 겪는 와중에도 주인공은 재치를 발휘하여 저항해 나가지만...(스포일러 방지)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다 읽고 해제까지 읽고 나서야 명확해지지만, 스토리의 긴장감에 압도되는 느낌이 신선했다. 그러니까, 재미있다. 책을 펴고 나면 덮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