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평 : 광인 (이혁진, 민음사)
- 작가의 전작 <사랑의 이해>는 읽지 않았지만 드라마를 아주 좋게 봤었다.
- 주인공 해원은 40대 초반의 싱글 남성. 그가 주식투자, 대출없는 아파트, 채굴같은 단어를 말하는 것이 내 또래라는 인식을 주어서 친근했고 금방 몰입할 수 있었다.
- 결혼 못한 스트레스로 엄마와 연락을 안한다는 설정. 이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지.
- 작가님 또한 딱 이 또래의 사람이었다.
- 위스키를 잘 모르지만 작중에 묘사되는 위스키의 맛에 대한 표현이 정말 좋다. 나도 위스키를 마셔보고 싶을 정도였다.
<경고> 스포일러 주의. 책을 읽고 난 후에 읽는 것을 권장함.
- 이 책에서 주인공 2인, 준연과 하진이 철학 이야기를 많이 해서 읽기가 조금 괴로웠다.
- 면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는가?
- 십중팔구는 없을 것이고, 그런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그와의 대화를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 1인칭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는 정말로 면전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 기분을 느낀다.
- 아마도 작가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평소 생각한 것을 말하고 있나 싶었다.
- 준연과 하진이 이런 철학을 깊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인물 설정이기도 했다.
- 그들의 실제 삶도 그런 모습이기에 망정이지, 그냥 듣기에는 개똥철학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내용들이다.
- 작품의 주인공인 나, 해원이 서서히 미쳐가는 과정을 실감나게 풀어놨기 때문에, 중간에는 조금 읽기가 버거웠다.
- 특히 불을 지르기 직전에는 개새끼라는 둥 원색적인 욕설을 동원하여 증오심을 표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 결국 준연과 하진을 두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혼자만의 망상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급격히 반전하는 심정을 묘사하는 것도 인상깊었다.
- 해원의 그릇이 크지는 않지만, 해원을 미쳐가게 만든 준연과 하진 두 남녀도 잘못했다는 생각이다.
- 그들의 잣대는 너무 높다. 두 남녀가 외딴 산속에서 몇날며칠을 밤낮으로 일하는 데 의심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 자신들은 고고한 철학으로 살아가기에 보통 사람의 마음을 배려할 생각따윈 없는 건가. 그들은 이건 아니잖느냐고 말하는 해원을 믿음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면서 그를 코너로 몰아넣었다.
- 나 빼고 둘이서 티키타카하고 내가 모르는 친근함을 과시하는 두 남녀가 곱게 보이는 남자가 어디있을까?
- 준연이 나중에 인정하듯, 그도 하진에게 연심을 품었던 것은 맞으니까.
- 하진 또한 준연과 헤어질 수 없기에 사귀지 않는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보기에 따라 그보다 더한 사랑고백이 있을까?
- 해원을 괴롭히는 사실은 두 사람이 진실로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들은 해원을 단 한순간도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그들을 의심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 해원이 스스로를 경멸하게 만든 것이 준연과 하진의 가장 큰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 죄짓고 맘편히 살 날이 없다는 교훈을 이 책에서 재확인할 수 있다. 해원이 생 지옥을 살아가는 과정이 후반부를 차지한다.
- 범죄자가 되어보는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은 소설만이 할 수 있지 않을까.
- 해원과 준연의 마지막 대화는 거의 스릴러급이다.
- 준연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해원은 나중에서야 알아차리게 되지만...
- 어쨌든 죄지은 해원으로서는 죄가 드러났다는 공포와 자신의 밑바닥을 보였다는 공포의 2중 충격을 받게 된다.
- 연이은 비극 속에서 해원은 모든 것을 깨닫고 스스로 삶을 끝내지만..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일수도 있다.
- 해원 시점에서 모든 고뇌를 함께한 독자로서는 주인공이 진실을 전하기로 결심한 이후 더 나은 방법이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 종교인으로서 더 고민해보았는데, 해원은 도망쳐서는 안되었다.
- 하진에게 모든 진실을 알린 후에, 하진이 자신을 극도로 증오하게 된다 해도 그것을 겪어 나갔어야 했다.
- 죽기를 원했다면, 하진이 자신을 죽이도록 했어야 한다.
- 또 하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가자고 하면 그것을 감당했어야 했다.
- 그것만이 온전한 속죄의 길일 것이다. 자살은 답이 아니다.
- 책이 끝난 이후 하진은 아기와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 진실을 알게 되는 그녀의 마음은 이제 가벼워지는가?
- 이 모든 비극에서 하진은 아무런 죄가 없는가?
-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지나친 고고함이 평범한 남자를 파멸시켰다는 것을 아프게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피와 살을 가지고 있고 적당히 어리석다.
- 고고한 선민의식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어리석음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진에게 많은 선택지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 해원은 하진에게서 그 선택지를 빼앗았다. 또 다른 죄이다.
-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내 모든 것을 파괴한 사람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너무 궁금하다.
- 해원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한 하진과 준연을 만나고 사랑했지만, 그 스스로의 본성은 벗어나지 못했다.
- 그 본성은 그가 증오해마지 않는 아버지와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자의 습성이고, 돈으로 안되는 일이 없다는 천박함.
- 죽을만큼 괴롭고 나서야 그는 하진과 준연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도. 그래서 죽음을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 또 한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해원이 자신의 죄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무너져 가면서도, 자신의 아기야말로 자신의 유일한 진실이라고 말하는 장면.
- 부모가 되어보니 정말 이 말에 깊게 동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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