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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평 : 해 질 무렵 안개정원 (탄 트완 엥, 자음과모음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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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면 여운이 있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이 딱 그런 책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한마디로 말하기엔 부족한 느낌입니다.  소설의 무대인 말레이시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배경이 다양한 것이 인상적이다. 말레이시아에서의 삶이란, 어떤 것일지 조금이나마 경험한 느낌이다. 주인공 윤 링과 그녀의 가족들은 중국계이지만 중국어를 할 줄 모르고 말레이 반도에서 굳게 자리잡은 해협중국인들이다.  본토 중국인들과 서로 감정이 좋지 않다. 말레이 원주민들과도 계급차이를 느낀다. 윤 링 가족과 긴밀한 마주바 차 농장의 주인은 네덜란드계 남아공인. 그들은 푸른 눈의 백인이지만 말레이 반도를 지배하는 영국인들과 감정이 좋지 않다. 보어 전쟁에서의 기억 때문이다. 여기에 말레이 반도를 침략한 일본군이 있다. 일본군은 강제 노동 수용소를 만들고 여성들을 위안부로 만드는 만행을 저지르는데... 일본이 패퇴하고도 여기에 남아있는 조경사 아리토모는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전쟁은 그들을 망쳐놓았고, 그 잔해 속에서 삶을 이어나가지만 상처는 아물 줄을 모른다. 그 때 언니의 유언에 따라 일본식 정원을 만들고자 하는 윤 링이 아리토모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함께 정원을 가꿔나가게 된다. 정원에 대한 일본의 철학을 조금씩 배워나가는 주인공. 정원을 가꿔나가는 노동과 변화해가는 계절들이 독자의 심상에서 정원을 만들어간다. 윤 링과 아리토모의 사랑이 아름답다.  서로 외모에 반해서도 아니고 같이 있는 시간이 즐거워서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것들을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 다시 기억하기조차 싫은 고통의 시간들을 담담하게 말하게 해주는 사람. 보통이라면 무례하게 느낄수 있는 질문들을 해오는 사람. 이런 에피소드가 하나씩 쌓여나가면서 사랑에 빠지는 모습이 아름답다. 사랑의 완성은 아리토모가 윤 링의 몸에 문신을 새겨주면서... 아리토모는 어느 날 실종되어 버리고, 윤 링은 정원을 떠나 노인이 되어서야 돌아온다. 그리고 그들...

독서평 :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북다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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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재미없었던 적은 없었다. 최소한 읽는 동안에는 말이다. 믿고 읽는 작가 중의 한명이다.  살인사건을 겪은 유족들이 모여서 사건을 재검증한다? 그것도 강제성 없이 자발적으로? 다분히 일본스러운 설정이고 부자연스럽다. 그래도 소설이니까 용서해주고 넘어간다. 가가 교이치로 형사는 매력적이다. 냉정하고 논리적이면서도, 따뜻한 배려심이 있다.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용의자를 차근차근 밝혀나간다. 읽을 때는 몰랐지만 다 읽고나서 생각해보면 조금 웃기는 점이 있다.  용의자는 태연하고 침착하게 사람들 속에서 가가 형사의 추리를 구경한다. 하나씩 진실이 드러날 때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그러다가 가가 형사가 당신이 범인이라고 지목하는 순간, 또 태연하게 인정하고 차분하게 범행을 자백한다. 솔직하게 좀 납득하기 어려운 캐릭터들이다. 읽는 사람을 두번 놀라게 하는데… 특히 무고하고 순진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사람이 요주의 인물이다. 그건 실망스러운 점이기도 하다. 추리소설을 하도 많이 쓰다보니 이제 독자를 놀래키기 위한 방법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10년 하가시노 작품 중 틀림없는 최고 걸작이라는 홍보 문구에 동의 못하겠다. 재미있는 건 틀림없지만 평이하다.

독서평 : 야코프의 천 번의 가을 (데이비드 미첼,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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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습니다. 와, 정말 너무 재밌어요. 읽으면서 계속 감탄하면서 재밌다고 느끼는 중입니다. 이 책을 펼치면 당신은 그 세계로 빨려들어갑니다. 당신은 에도 막부시대 말기, 나가사키에서 유일하게 외국인 접촉이 허락된 데지마 섬에서 무역상인으로 일하는 "야코프 더주트"라는 네덜란드 사람이 됩니다. 1인칭 시점은 아니지만, 주로 야코프의 시점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들로만 서술을 제한하기에 이런 몰입감이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그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좋아합니다. 그런 소설은 흔하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제가 일본인들보다 야코프에게 더 동질감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야코프의 사고방식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제가 서구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주인공을 둘러싼 사건들은 미스테리 분위기를 물씬 풍기면서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일본 측 사람들은 의뭉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렇다고 네덜란드 사람들이 모두 친구이냐? 그것도 알 수 없죠. 누가 친구고 누가 적인지를 모르는 애매함이 긴장을 최고조로 높여줍니다. 주인공은 정직하고 선한 사람입니다. 직장인으로서의 조직에 대한 양심을 지키며 정도를 실천하려고 합니다.  부정부패를 일삼는 동료 직원들과 일본 측 통역관들은 주인공을 싫어하기도 하고 협박도 합니다. 이로 인해 느껴지는 긴장감이 재미를 더해줍니다. 그러나 작가가 설계한 음모는 너무 음침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갑자기 작품이 무협지 수준으로 떨어진 느낌입니다.  그러나 긴장감과 호기심은 오히려 커집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전개속도가 빠르고, 작가가 벌려놓은 문제들은 급하게 해결되는데 약간 당황스럽지만 또 나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런 해결이 최선일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야코프와 여주인공의 마지막 대화는 모든 것을 매듭짓는 장면입니다. 좋은 마무리입니다.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 역사를 좋아하신다면 더더욱 재미있을 것입니다....

독서평: 구하라, 바다에 빠지지 말라 (리처드 로이드 패리, 알마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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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본 대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로 수만명이 사망한 가운데, 도호쿠의 오카와 초등학교의 학생들이 대부분 사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학부모들은 같은 재난을 겪은 다른 지역에서는 어린이 사망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오카와 초등학교의 비극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부 아이들이 산으로 가야한다고 말했지만, 교사들이 그들을 통제하고 오히려 위험이 커지는 방향으로 아이들을 인도한 것이 드러나고...  저자의 취재 여정을 따라가며 진실이 한 겹씩 드러날 때마다, 아이들을 잃어버린 가족들의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고통은 읽는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재난을 겪은 사람들의 인터뷰는 건조하면서도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수많은 가족의 아픔들은 모두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또 가슴이 아팠던 것은, 입장의 차이로 인해 유족들 또한 서로 반목하게 되어버리는 모습들입니다. 유해를 찾아 끈질기게 노력하는 엄마는 정부에 소송을 제기하는 엄마를 미워합니다. 소송을 준비하는 엄마는 일본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려는 자신들을 돕지는 못할 망정 미워하는 유족들이 서운할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슬픈 일이 자꾸 생기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재난 가정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속내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서양인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들은 같은 일본인들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내보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일본 특유의 수동적 태도, 무기력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일본 특유의 체면 문화와 공감능력 부족은 유족들에게 얼마나 잔인한지.  한국 사회가 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생각나게 만드는 대목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과 어쩌면 그렇게 비슷한지. 사고 이후에 정부와 당국이 모두 책임을 회피하는 장면도 기시감을 느끼게 합니다.   팩트 위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