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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평: 숨 (테드 창, 엘리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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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장 좋아하는 SF작가 테드 창의 작품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여러 단편들이 모두 재미있으면서도 깊게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같이 읽고 이야기하기에 좋은 책입니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이제껏 보아온 모든 타임슬립물 중에서 가장 완벽하다. 과거와 미래가 만나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그저 더 잘 알게 된다는 설정. 운명론이기도 하면서, 과거를 더 잘 알게된 후로는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다.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즉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정말 감탄사만 나온다. <숨> 엔트로피와 에너지 평형, 궁극의 평형에 도달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물리학적 종말론. 그걸 알면서도 지금 묵상하고 감사한다. 명작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 자유의지가 없음을 증명하는 장치가 나온다면? Arrival 과 일맥상통인가. 그래도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철학적 고찰까지. 테드 창은 천재이다. 디지털 저장장치로 삶의 모든 순간을 저장하고 검색하는 발상은 참신하기도 하고, 고찰이 단순하지 않아서 좋다. 따뜻한 기억을 잃지 않도록 라이프로깅에 반대하는 듯하다가 진실을 발견하고 겸손해진다는 이야기. 모두들 겸손할 지어다.  앵무새가 화자로 등장하는 <거대한 침묵>은 서정적인 시편같다. <옴팔로스>는 신에게 기도하는 기도문의 형태를 하고 있다. 신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것 같지만 그 고백조차 신에게 향하고 있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평행자아를 만난다는 신선한 아이디어. 그 속에 깊은 철학적 고찰. Arrival 이 생각나기도 하고. 내가 그때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자책하면서 삶을 낭비하는 사람에게 그 사건의 여러 버전을 보여주는 것은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감탄사가 나온다. 제일 마지막까지 미뤄둔 디지언트 애완동물 이야기는 정말 대작이다. 유기체의 모든 것을 모사하는 디지털 유전자를 만들면 지성을 갖춘, 인간 아기가 성장하는 것처럼 ...

독서평: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한나 렌, 엘리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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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님이 천재라고 하셔서 읽음. 읽어보니 천재가 맞았습니다. 여섯 편의 단편이 모두 창의적이고 기발하면서 완성도가 있다. 물리법칙을 비틀어서 만들어내는 설정에 감탄한다. 테드 창 이후로 이렇게 감탄하면서 읽은 작품이 또 있었을까. SF팬이라면 강추합니다.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표제작. 왜 천재라고 했는지 알것같은 설정. 모두들 매끄러운 세계에서 산다는 것은 멀티태스킹에 쩔어서 사는 요즘의 우리들을 비유한 것 같다. 주인공은 결국 그 감각을 제거하는 선택을 하고 진정한 우정을 찾는다. <제로연대의 임계점> 너무 인상적이다. 신문기사 헤드라인 수준의 간략한 서술로 SF여성작가 3인의 삶을 그려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작품이다.  <미아하에게 건넨 총> 이건 정말 천재적인 작품 아닌가? 뇌를 마음대로 편집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온다면, 모든 전제가 뒤집힌다. 사랑이란 감정조차 그러한가. 압도적이다.  <홀리 아이언 메이든> 인간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진 언니와, 그 언니의 힘을 피해 살아남은 동생. 언니가 세상을 바꿔나가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다. 이것도 천재적이다.  <싱귤래리티 소비에트> 냉전 시기에 인공지능이 특이점을 넘어섰다는 설정. 인공지능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소련과 미국. 소련은 승리하고 인류는 어떻게 되는건지 기괴한 상상의 현실. 천재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빛보다 빠르게, 느리게> 상대성 이론, 타임 스케일로 이런 세계를 만들어내나. 나와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상대는 영원히 나와 분리된다는 것. 반전도 있고 해피엔딩도 내 스타일이다. 읽으면서 천재라는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