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이 열린책들인 게시물 표시

책으로 떠나는 이탈리아 여행

2026. 6. 1. 나의 모든 기쁨, 나의 모든 비극은 이탈리아에서부터 온다. 아름다움이 늘 궁지에 몰리는 땅에서 내가 왔다. 장 바티스트 앙드레아의 <그녀를 지키다>를 시작하는 주인공의 말이다. 아름다움이 궁지에 몰린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탈리아가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답다는 말일 터이다. 이 소설의 무대는 피렌체, 로마, 그리고 토스카나의 어느 시골 마을이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탈리아의 이곳 저곳을 누비는 주인공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읽는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주인공은 난쟁이로 태어난 천재 조각가인데, <양철북>이라던가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등장한 난쟁이 인물이 떠오른다. 난쟁이를 주인공으로 설정하는 것은 치트키이다. 미천한 주인공은  마을 귀족의 별종 막내딸 비올라와 아름다운 우정을 키운다.  뻔한 설정이다.  다른 인물들이나 사건의 구도 등도 어디서 많이 본 설정들로 가득하지만,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다채로워서 괜찮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친구같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작가의 이야기솜씨가 대단해서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20세기 이탈리아 역사의 주요 사건들이 주인공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등장인물들도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언쟁을 벌인다. 결국 파시즘을 돌파해내는 주인공과 비올라의 묘책에 감탄했다.  어지간한 영화보다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결말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뻔한 해피엔딩으로 끝냈더라면 촌스러울 뻔했다. 

독서평 : 몰타의 매 (대실 해밋, 열린책들)

이미지
드디어 읽었습니다. 하드보일드 장르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몰타의 매>입니다. 미스테리한 분위기와 언제라도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이 가득합니다.  사실 이야기의 구조가 훌륭한 편은 아닌데, 작가의 묘사로 형성되는 분위기에 취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작을 안했으면 안했지, 일단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는 책입니다. 실종 사건에 대한 수사를 의뢰받은 탐정 샘 스페이드는 미스테리한 팜므 파탈 여성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사건에 말려들게 됩니다. 남자를 홀릴 줄 아는 팜므 파탈에게 주인공이 농락당하면서 시달릴 줄 알았는데, 농락은 커녕 그 팜므 파탈을 손아귀에 잡고 갖고 놀아버리는 주인공! 저는 이런 전개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통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은 정의의 편 아닌가요? 이 소설의 주인공인 샘 스페이드는 전혀 선한 구석이 없습니다. 물론 그에게 당하는 사람들도 악인이니 어느 정도 통쾌하기는 하지만, 악인과 악인의 대결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다만 이런 냉혈한 주인공이라도 그의 비서에게는 한없이 다정한데요. 비서에게 이런 저런 부탁을 하고서는 "에피는 천사야!"라고 말하는 모습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이 대사가 킬링 버스인 것 같습니다. 미스테리가 해소되면서 등장하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 하나가 가장 인상깊었습니다. 이중 생활을 해온 작중 인물이 자신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들려주는 이야기인데,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평범한 남자가, 길을 걷다가 철제 빔을 거의 코앞에서 맞을 뻔한 사고를 겪는데, 그 즉시 현재의 가족과 삶을 모두 버리고 다른 도시에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 남자의 주변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철학적으 로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프릿크래프 트는 휼륭한 시민이자 좋은 남편이고 아버지였다.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주변 환경에 맞추어 사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식으로 교...

독서평: 플로베르의 앵무새 (줄리언 반스, 열린책들)

이미지
이런 걸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나? 왜 이 작품이 소설로 분류되는지 잘 모르겠다. 화자는 플로베르라는 작가를 추앙하면서 그의 흔적을 쫓고, 독자는 그의 여정을 함께하는데 대부분 화자가 주절주절 떠드는 내용을 듣는 입장이 된다. 그 내용이 재미가 없다는 건 아니다. 다만 어떤 주요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작가가 플로베르의 연대기를 3번에 걸쳐 다르게 보여준 것은 무척 흥미로웠다. 인간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걸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나? 한 챕터에서는 플로베르의 연인이었던 여인의 변론을 소개한다. 그 부분도 무척 재미있었다.  또 다른 챕터에서는 플로베르에 대한 시험문제를 출제했다. 한국인이라면 익숙할 것 같은 형식이다. 나도 모르게 시험문제를 풀어보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게 되면서, 작가가 의도한 생각의 틀로 들어가는 경험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읽는 내내 당혹스러움을 느끼면서도 그만두지는 못했다. 생각해볼만한 고민들과 흥미로운 이야기들에 사로잡혀 끝까지 읽어내고 말았다.  다 읽고 작품해설을 보니, 이 작품은 “전기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작품이라고 한다. 사실 플로베르라는 인물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지만, 다양한 각도로 어떤 인물에 대해 접근해가는 방식은 분명 비교대상이 없는 독특한 경험이다. 화자의 말 중에서 가장 뜨끔했던 대목을 소개하고 싶다.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더더욱 준엄한 비판이다. 책은 일어난 일을 설명해 주는 곳이고, 삶은 설명이 없는 곳이다. 삶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는다. 책은 삶을 의미 있게 한다. 유일한 문제는 책이 의미를 부여하는 삶은 당신 자신의 삶 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 이라는 점이다. (209)